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타타르의 멍에 (문단 편집) === 악영향 === > 러시아의 후진성은 부분적으로 1230년경에서 15세기 중엽까지 몽골이 러시아를 점령했던 사실에 기인한다. 몽골은 [[보야르]]의 풍습과 습관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서구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던 3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러시아는 유럽 문명에서 단절되어 있었다. 몽골의 러시아 지배 기간에 출현한 국가 모스크바 대공국은 13세기 초까지 존속했던 [[키예프 공국]]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국가였다. 보야르들은 가부장적인 관습인 도모스트로이 - 러시아인 아버지들에게 성경과 '''자작나무 몽둥이'''로 가정을 통제하는 법을 교육했던 16세기 지침서 - 를 따라 상인과 농민들처럼 가족들을 지배했다. >----- > 나탸샤 댄스 : 러시아 문화사 / 올랜도 파이지스 저 > "[[대수학]]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갖고 오지 못한 [[아랍인]]" >---- >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러시아를 침략했던 몽골인들을 두고 중세 초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던 아랍 무슬림들이 이런저런 선진 과학기술을 가져와서 중세 스페인을 발전시켰던 것[* [[후우마이야 왕조]] 시절 [[코르도바(스페인)|코르도바]]는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던 도시였다.]과 다르게 중세 러시아 사회를 퇴보시키기만 했다는 것을 비판하는 표현.[* 여담으로 러시아가 유럽이 아닌 아시아라고 놀림받는다면, 같은 맥락에서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스페인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라고 놀림받는다.]] 문장 하나에 정말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었다 볼 수 있다.] 키예프-루시 계열 공국과 동슬라브 문화권의 중심지로 인구가 4~5만에 달했던 키예프만 봐도 "죽은 사람을 위해서 울도록 열려진 문은 아무곳에도 없었고 200여 채의 집들만이 남았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철저히 파괴당하거나 학살당했으며, 이전까지 러시아를 지배하던 공국 연합체들은 구심점이 없어져 버렸다.[* 이후 한동안 루스 계열 공국들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등등의 침략을 받는다.] 이후 240년에 이르는 몽골의 과도한 공납 요구는 루스 사회가 크게 낙후되는 원인이 된다. 물론 몽골인들은 러시아를 마치 원나라가 한족들을 지배한 것처럼 직접 눌러앉아서 지배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간접적인 지배에 그쳤다. 그러나 비슷한 케이스였던 한국사의 고려 말 [[원 간섭기]]가 바로 농민들의 대한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시대로 꼽히는 등 암울했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몽골 압제의 악영향은 간접 지배라 할지라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몽골 제국 군대가 잠깐 약탈하고 지나간 헝가리만 해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피난민 범람과 뒤이은 전염병의 창궐로 인구가 대폭 감소하고, 헝가리의 극심한 침체기를 유발했던 바 있었다.] 여기서 몽골인들이 요구했던 공납은 돈이나 물자 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되었다. 칼가 강 전투로부터 수십여 년이 지난 1274년 몽골군은 [[스몰렌스크]]를 한 차례 약탈하였으며 1278년에는 [[랴잔]]을 약탈하였다. 1293년에는 몽골군이 다시 14개 공국을 침략하여 약탈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루스인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이렇게 노예로 잡혀간 것 외에도 임의로 루스 군인들을 징발하여 멀리 [[원나라]]로 파견하여 눌러살게 만드는 등등 인적 자원의 수탈도 만연하였다. 정작 처음부터 몽골에 항복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갈리치아-볼히니아]]의 경우 약탈 피해가 적었다. 다시 말해서 몽골-타타르인들은 이미 항복한 상황에 있던 공국들을 트집을 잡아서 침략하고 약탈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몽골은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도시들에게는 잘 해준편이다'라는 통념은 적어도 동유럽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14세기에는 그나마 비교적 인구가 많았던 트베리 공국과 랴잔 공국은 킵차크 칸국의 노예 셔틀로 전락하였다. 14~15세기 들어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일대에 흩어져 있던 [[루테니아]]의 여러 공국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팽창하자마자 킵차크 칸국에 대한 신종 맹세를 뒤집고, 별 다른 연고 관계도 없던 리투아니아 측에 투항한다.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은 특별히 군사력이 막강한 것도 아니었고 인구도 얼마 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이 루테니아 여러 공국에 무혈점령까지 하면서 영토를 급격히 확장했던 것은 이들이 타타르인들보다 공납을 적게 요구했기 때문에(다시 말해서 타타르인들이 공납을 과도하게 수취했기 때문에) 아니 적어도 이미 항복한 상황에서 또 쳐들어와서 집을 불지르고 사람을 납치하는 일은 안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근대 국가에서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퇴보하는 것은 문화에도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침입 이전에 러시아는 [[노르드]] 문화를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보다 못할 것은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8세기를 이후로 해서 수백 년 후의 소빙하기까지 유럽은 꽤나 온난한 기후였기에, 모스크바가 위치한 북부 루스와는 달리 키예프 등이 위치한 남부 루스는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했다.] 비교하자면 푸시킨이 비교 언급한 [[알 안달루스]]의 아랍인들은 적어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지배하는 동안, 서로마 제국 말기 이래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있던 관개수로를 보수, 확충하고 신작물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경제도 부흥시키고 인구라도 늘려놓았는데, 몽골 제국의 경우 그 반대로 과도한 공납 요구로 경제도 계속 침체시키고 지속된 납치로 인구도 계속 줄여놓았다. 몽골 제국에 의해서 철저하게 갈려나간 이후 러시아는 격심한 퇴보를 겪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있다. 본래 키예프 루스는 [[흑해]]와 [[발트해]]를 잇는 수운 무역으로 번영하던 도시국가들의 집합체였으나,[* 오늘날 스웨덴에서는 중앙아시아 [[사만 왕조]]의 은화는 물론 [[간다라]] 불상 유적까지 발견된다. 이러한 물자들은 당시 같은 노르드 계열이던 루스인들의 중계 무역을 통해 수입한 것이다.] 몽골-타타르 세력이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야|카파]] 항구를 장악한 이후 흑해 무역의 이익이 러시아에서 킵차크 칸국, 크림 칸국으로 옮겨간 것이다. 루스 차르국이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하기 이전 모스크바 대공국의 상업이 당시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유달리 빈약했던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거치며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었던 러시아의 상황은 19세기쯤 러시아 내 독빠 황제들이 즉위하고 [[독일계 러시아인|독일계 인구]]가 대규모로 유입되고 나서야 그럭저럭 만회할 수 있었다. 루스의 민회(베체) 전통을 상징하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몽골에게 공납을 바치며 성장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 그리고 이반 4세 시절 종말을 맞이한 것은 우연일까? 이반 3세는 [[1471년]] [[6월 14일]], 쉐론 강 전투(Шелонская битва)에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예속화했다.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를 모스크바에 예속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브고로드의 관리들을 압박했고, 결국 [[1478년]] 노브고로드는 이반을 주권자로 인정하였다. 이로써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예속되었다. 이후 [[이반 4세]]는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베체를 유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노브고로드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학살을 벌인다. 러시아가 몽골에 대한 공납을 중단한 이후에도 한동안 그 영향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서구 사학자들이 러시아인들의 집단주의의 기원으로 러시아인들은 몽골-타타르의 멍에가 끝난 이후에도 크림 타타르족의 침략에 맞서서 한겨울에 주민들을 징발하여 목책을 쌓는 과정에서 결코 불평을 할 수 없었던 당대의 상황을 들고 있다. 정리하자면 몽골의 정복 이후 러시아의 권력구조가 한 차례 박살나고 대대적으로 개편[* 개편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사실상 마개조에 가까우며 중앙 집권화가 되었을 때는 [[이반 4세]]때이다.] 되면서 현재에 이르는 대제국 러시아의 기틀이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개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를 수습하는데 걸린 수백년의 기간 동안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이 별 관심을 기울일 가치도 없는 시시한 국가로 전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